본문으로 건너뛰기
김장환金長煥

1965년 8월 13일, 한국군 베트남 파병 동의안 통과

역사는 흑백으로 재단할 수 없습니다. 성과는 냉정하게 평가하되, 희생된 이들의 아픔 또한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김장환의 오늘의 역사 — 1965년 8월 13일 한국군 베트남 파병 동의안 통과
원본 이미지 보기

베트남 파병, 명분과 실리는 무엇이었나?

1965년 8월 13일, 국회는 한국군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야당이 한일협정 비준과 베트남 파병에 반발하며 표결에 불참한 가운데 통과된 이 결정은, 대한민국이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비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에 이어 청룡부대와 맹호부대, 백마부대가 차례로 파병되면서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32만 명) 을 보낸 참전국이 되었다.

베트남 파병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엇갈린 평가를 받는 사건 가운데 하나다. 당시 정부는 자유진영의 일원으로 공산주의 확산을 막고, 6·25전쟁 당시 국제사회의 도움에 보답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동시에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경제 개발에 필요한 외화를 확보하려는 현실적 목적도 있었다. 실제로 파병을 계기로 군수, 건설 계약과 외화 유입이 크게 늘어나면서 산업화 초기 한국 경제의 성장 기반을 마련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이면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 수많은 젊은 장병들이 낯선 땅에서 목숨을 잃거나 평생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안고 돌아왔다. 당시 전사자가 5,099명, 부상 11,232명, 고엽제 피해자는 159,132명이다. 또한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한국과 베트남이 함께 성찰해야 할 역사적 과제로 남아 있다. 경제적 성과만으로 모든 희생을 설명할 수도 없고, 반대로 희생만으로 당시의 시대적 선택을 단정할 수도 없다.

역사는 흑백으로 재단할 수 없다. 베트남 파병은 안보와 외교, 경제와 윤리, 국가의 생존과 인간의 존엄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선택이었다. 우리는 그 결정이 가져온 성과는 냉정하게 평가하되, 그 과정에서 희생된 모든 이들의 아픔 또한 함께 기억해야 한다.

베트남 파병, 숫자로 보기

  • 파병 기간 — 1964년 9월 ~ 1973년 3월
  • 연인원 — 약 32만 명 (미국 다음 규모)
  • 주요 부대 — 비둘기부대, 청룡부대, 맹호부대, 백마부대
  • 전사 5,099명 · 부상 11,232명 · 고엽제 피해 159,132명
공유하기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