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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환金長煥

918년 7월 30일, 왕건 고려를 건국하다

나라의 위기를 이겨내는 힘은 무력이 아니라 통합과 자주, 그리고 문화의 힘에서 비롯됩니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500년 왕조를 세우다

918년, 송악의 호족 출신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했다. 당시 한반도 정세는 남북국시대의 한 축을 이뤘던 신라가 귀족 신분제인 골품제의 폐단으로 귀족 분열과 조정의 지방통제력 약화로 힘을 잃어가고 있는 시기였다.

또 상주에서 일어난 원종·애노의 난(889년)처럼 농민 봉기가 발생했고, 이를 계기로 지방 호족들이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지배 체계를 갖추게 된다. 그중 궁예와 견훤은 스스로 왕을 자처하며 나라를 세웠는데, 궁예는 후고구려를, 견훤은 후백제를 세워 후삼국시대가 개막되었다.

궁예는 고구려의 정신을 이어받아 국호를 후고구려라 칭했다. 영토 역시 과거 한반도 이북 지역을 다스렸던 고구려의 영역에서 나라를 통치했다. 견훤도 백제를 계승하고자 현재의 호남지역을 아우르며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했다.

그러나 궁예는 시간이 지나면서 미륵신앙에 기반을 둔 정치를 추구하며 점차 포악한 치세로 신하들의 불만과 두려움을 샀다. 이에 궁예의 밑에 있던 왕건을 지지하는 세력이 커졌다.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신하들은 왕건을 추대했고, 이에 왕건이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 철원에서 고려를 건국하게 된다. 이로써 왕건은 고려의 태조가 되었고 이듬해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다.

이후 왕건은 후삼국 통일을 위해 견훤의 후백제와 전쟁을 치렀고 점차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된다. 그때 후백제의 공격에 시달리며 파탄 직전에 놓인 천년 왕국, 신라 경순왕은 왕건에게 나라를 통째로 넘기고 말았다. 이후 왕건은 후백제의 내부 분열을 틈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936년 후삼국을 통일했다.

500년을 버텨낸 고려의 저력은 어디서 나왔을까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1392년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474년 동안 한반도를 지배했다. 그런데 고려는 11세기 거란, 12세기 여진, 13세기 몽골, 14세기 왜구·홍건적 등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근 500년 동안 고려의 명맥을 유지하며 끝끝내 나라를 지켜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그러한 고려의 저력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첫째는 포용의 정치였다. 왕건은 건국 직후 훈요십조를 남기며 무력보다 화합을 강조했다. 후백제와 신라의 인재를 적으로 돌리지 않고 함께 나라를 운영했으며, 지방 호족과도 혼인과 협력을 통해 통합을 이끌었다.

둘째는 강인한 국방력과 국민의 단결이었다. 거란의 세 차례 침입을 막아낸 서희의 외교와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고려가 무력만이 아니라 지혜로 국난을 극복했음을 보여준다. 몽골과의 40년 항쟁에서는 백성들이 스스로 일어나 저항했다.

셋째는 문화의 힘이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금속활자, 고려청자, 팔만대장경은 고려가 전쟁만 치른 나라가 아니라 문화를 통해 국가의 정체성을 키워 온 나라였음을 말해준다. 특히 몽골 침략 중에 완성한 팔만대장경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새긴 민족의 정신력이었다. 문화는 나라의 품격이자 위기를 견디게 하는 힘이었다.

물론 고려는 무신정권의 등장, 권문세족의 부패, 원나라 간섭기 등 숱한 내부 문제도 겪었다. 그러나 외세에 굴복하지 않는 자주정신과 갈등을 통합하는 정치력, 그리고 문화를 꽃피우는 역량이 있었기에 장구한 세월을 버틸 수 있었다.

왕건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고려라는 왕조가 아니라, 나라의 위기를 이겨내는 힘은 무력이 아니라 통합과 자주, 그리고 문화의 힘에서 비롯된다는 역사적 교훈이다.

고려 500년을 버틴 세 가지 힘

  • 포용의 정치 — 훈요십조, 옛 후백제·신라 인재 등용, 호족과의 혼인 동맹
  • 국방력과 단결 — 서희의 외교, 강감찬의 귀주대첩, 몽골과의 40년 항쟁
  • 문화의 힘 — 금속활자, 고려청자, 팔만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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