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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환金長煥

1949년 8월 5일, 한국을 세계에 알린 헐버트 사망

정의와 자유를 위한 마음에는 국경이 없음을, 그는 자신의 삶으로 증명했습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는 여순 감옥에서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 고 말했다. 왜냐면 그는 한국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기 때문이다. 한글을 연구해 누구나 쉽게 읽고 쓸 수 있도록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 등을 도입했다. 또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를 집필하여 그것으로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쳤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인, 사람들은 그를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라 불렀다. 그의 이름은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였다. 그는 1886년 관립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조선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교육자를 넘어 조선을 깊이 이해하려 했고, 조선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조선의 운명을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 이한응 열사가 육영공원 출신임)

무엇보다 그는 한글의 가치를 먼저 알아본 인물이었다. 당시 외국에서는 한자를 동양 문명의 상징으로 여겼지만, 헐버트는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배우기 쉬운 문자” 라고 극찬했다. 그는 한글을 연구하여 최초의 한글 교재를 만들었고 우리 문자와 문화를 세계에 소개했다. 우리가 스스로도 한글의 가치를 충분히 깨닫지 못하던 시절, 한 외국인이 먼저 그 위대함을 알아본 것이다.

그의 사랑은 문화유산으로도 이어졌다. 1907년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가 고려시대 국보인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불법으로 일본에 반출하자, 헐버트는 《대한매일신보》의 어니스트 베델과 함께 이를 강력히 비판하며 국제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의 끈질긴 문제 제기는 결국 석탑이 우리 품으로 돌아오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헐버트는 한국의 독립뿐 아니라 문화와 역사까지 지키려 했던 진정한 벗이었다.

한글의 가치 발견 — ‘띄어쓰기’ 도입

을사늑약 이후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그는 국제사회에 대한제국의 억울한 현실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고종의 밀서를 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국제 여론에 호소했고, 여러 저술과 강연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고발했다. 이를 못마땅히 여긴 일본의 압력으로 그는 결국 조선에서 추방되었지만, 미국에서도 평생 한국 독립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49년, 광복을 맞아 정부 초청으로 대한민국을 다시 찾은 그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바람대로 헐버트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잠들게 되었다. 국적은 미국인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누구보다 한국을 향해 있었다.

우리는 애국을 흔히 같은 민족만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헐버트는 정의와 자유를 위한 마음에는 국경이 없음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했다. 그는 한국인이 아니었지만 한국을 위해 싸웠고, 한국인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우리의 가치와 문화유산을 누구보다 소중히 지켜냈다.

진정한 친구는 어려울 때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다. 호머 헐버트는 대한민국이 가장 어두웠던 시절 끝까지 함께한 진정한 친구였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한 외국인을 기리는 일이 아니라, 정의와 양심, 그리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국경이 없음을 기억하는 일이다.

안중근 의사가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지만, 필자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목숨이 다하도록 한국을 대변한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을 포함하여 이 두 사람만큼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호머 헐버트가 남긴 것

  • 한글에 띄어쓰기·쉼표·마침표 도입
  • 「사민필지(士民必知)」 —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
  • 경천사지 10층 석탑 불법 반출에 맞선 국제 여론전
  • 헤이그 특사 지원 등 대한제국의 독립 외교 활동
  •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 양화진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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