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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환金長煥

1882년 8월 26일, 흥선대원군 청나라에 납치되어 끌려가다

그날 끌려간 사람은 대원군 한 사람이었지만, 조선의 자주권 역시 함께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조선의 자주권도 함께 끌려가고 있었다

1882년은 조선의 역사에서 〈임오군란〉 이 일어난 해이다. 그런데 그와 관련, 참으로 서글픈 장면 하나가 기록되어 있다. 한때 조선의 개혁을 이끌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청나라 군대에 붙잡혀 국경 밖으로 끌려간 것이다. 자신의 나라, 자신의 수도에서 외국 군대에 의해 강제로 연행된 사건은 한 개인의 불행을 넘어 당시 조선이 처한 위태로운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사건의 발단은 임오군란이었다. 오랜 기간 차별과 열악한 대우를 받아온 구식 군인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조선의 정국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고종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다시 정국을 맡겼고, 대원군은 짧은 기간이나마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 중전(민비)은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했고, 청군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청은 대원군을 임오군란의 책임자로 지목하고 그를 체포하여 중국으로 압송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여러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다. 그의 쇄국정책과 개혁에는 분명 시대적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왕권을 바로 세우고 세도정치의 폐단을 혁파하며 국가의 자주성을 지키려 했던 그의 강한 의지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 그가 외세의 군대에 의해 끌려가 유폐되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조선이 더 이상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기 어려운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대원군 한 사람의 피랍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한층 강화했고, 일본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조선 땅은 점차 청과 일본 등 외세가 서로 영향력을 다투는 무대로 변해갔다. 한 나라의 내부 갈등과 권력 다툼이 외세의 개입을 불러들이면 결국 그 대가는 국민과 국가 전체가 치르게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게 된다.

사실, 이때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군대가 대원군을 압송해 가면서 용산에 군사 기지를 만들고 주둔하기 시작했다.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군이 용산에 주둔했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기지가 용산에 자리 잡았다. 즉 우리 서울 한복판에 외국 군대가 140여 년 동안이나 주둔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 바로 민 중전(민비)이었다.

1882년 8월 26일, 흥선대원군이 끌려가던 순간 그가 느꼈을 심정은 어떠했을까. 권력의 정상에서 나라를 이끌었던 인물이지만, 정작 자신의 운명조차 지킬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그날 끌려간 사람은 대원군 한 사람이었지만, 혼자만 끌려간 것이 아니었다. 조선의 자주권 역시 함께 끌려가고 있었다. 나라가 스스로의 혼란을 수습할 힘을 잃을 때, 외세는 그 틈으로 들어온다. 흥선대원군이 끌려간 그날의 한양은, 주권을 잃어가는 나라의 처참한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말한다. 나라가 약해질 때 외세는 국경 밖에만 머물지 않으며, 내부의 분열은 결국 나라의 주권까지 내어주는 길이 될 수 있다고….

흥선대원군이 끌려간 그날의 슬픔을 기억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강한 나라는 힘이 센 나라만이 아니라, 내부의 갈등을 스스로 극복하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역사는 냉정하게 경고하고 있다.

용산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게 된 시작

  • 1882년 — 임오군란, 청군이 대원군 압송하며 용산에 군사 기지 설치
  • 청일전쟁 이후 — 일본군이 용산에 주둔
  • 해방 이후 — 미군기지가 용산에 자리
  • 서울 한복판에 외국 군대가 140여 년간 주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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